계엄 석달+3주, 여전히 광장을 지키는 '맘마동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망원정x 격주간 정치대담 아티클
"망원정담" #7
광장을 지키는 초대형 말벌시민
'맘마 동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
|
'망원정담'은 지금 우리가 얘기나눠봐야 할 정치적 대화의 주제를 선정, 주제에 맞는 게스트와 대담를 나누고 그 내용을 갈무리해 이메일 아티클로 보내드리는 망원정x의 온라인 기획입니다. |
|
|
오늘의 이야기손님
오늘의 이야기손님은 지난 12.3 계엄 직후 '야생맘마먹음이보존협회' 깃발을 들고 광장으로 뛰쳐나와 석달 하고도 3주가 지나도록 계속 탄핵 광장과 뭇 투쟁 사업장을 굳건히 지켜온 '말벌 시민' '맘마 동지' 송예은 님입니다.
|
|
|
인사말과 자기소개
장혜영
먼저 바쁘신 와중에 망원정x의 정치 대담 아티클 망원정담의 대담자로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자 분들께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맘마
안녕하세요. 저는 활동명은 ‘야생 맘마먹음이 보존 협회’입니다. 줄여서 ‘맘마동지’로 불리고 있고요. 이제는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조합원 송예은입니다.
장혜영
네. 그리고 오늘의 망원정담에는 특별히 ‘맘마 동지’ 송예은 님과 함께 저번 ‘차제알’ 편에 등장하셨던 ‘요지경’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국회에서의 탄핵 가결 후 남태령과 한강진을 거치며 일어난 광장의 진화를 상징하는 존재가 바로 ‘말벌 시민’이죠. 윤석열 퇴진 집회가 석달반이 넘어가는 시점에 광장의 다양성이 일종의 한계를 드러내는 지금 가장 중요한 투쟁의 지점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 생각해보니 역시 ‘말벌 동지’ 였습니다.
이 말벌 시민, 말벌 동지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어떻게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보고 있는지를 들어보는 것이 사람들이 지금의 정치적 불확실성을 견뎌내는 데 굉장히 큰 힘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맘마 동지는 제가 아는 말벌 중의 말벌이시죠. 전직 태권도 국가대표 선수 출신 연극계 종사 20대 여성이시고요. 그리고 최근 ‘조선하청지회’ 노조원이 되었지만 사실 배를 만들어본 적은 없는. (ㅎㅎㅎ)
맘마
제주도에서 몇 번 타보긴 했는데요.
장혜영
나는 어쩌나 지금의 내가 되었나, 그 얘기부터 좀 편안하게 들려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일단 광장에 언제 처음 결합을 하셨나요?
|
|
|
'민주노총이니까
가도 되겠다 싶어서'
맘마
계엄 직후인 12월 4일 아침이요. 아침에 처음 국회를 갔는데 그때는 상황이 좀 정리돼서 사람이 얼마 없었어요. 아직 경찰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가 9시에 광화문에서 민주노총 기자회견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민주노총이면 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터벅터벅 걸어갔어요. 구호 외치고 그냥 앉아 있었죠. 같이 연대왔던 언니랑 밥먹고 이것저것 하다보니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2시에 긴급 뭘 한다고 국회로 오라고 했다고 해서 갔죠. 그런데 사람이 엄청 많았어요. ‘야 사람 많다’하고 사람구경 하다 저녁에 또 광화문 가고. 그날 이후 매일 저녁 광화문에 갔어요. 국회에서 할 때는 계속 국회에 있고요.
그러다 남태령을 갔는데, 남태령 이후에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에서 시민들을 초대를 했잖아요. ‘당신들이 알고싶다’고. 처음에는 교통비 때문에 고민을 좀 했는데, 2만원짜리 대학생 버스가 있다고 해서 ‘2만원이면 당장 가야지’하고 갔어요. 그러고 끝일 줄 알았거든요. 이 사람들 너무 좋지만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갑자기 이틀 뒤에 한강진이 열렸죠. 그런데 거기 또 이분들이 계신 거예요. 그때 그분들을 ‘선배님’이라고 불렀어요.
장혜영
‘선배님’이요?
맘마
투쟁 선배니까요. 저는 전장연 지하철 투쟁에도 연대를 갔으니까 ‘선배님 저 서울교통공사랑 맞다이 떠서 이겼어요’ 막 자랑하고, 그때 카메라 들고 가서 찍은 사진도 자랑하고 그랬죠.
그때 김형수 지회장님이 기분 좋게 이런 발언을 하셨어요. “동지들,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입니다. 470억 손배 받은 노동자가 어떻게 왔느냐. 열심히 투쟁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에 한 조합원 동지가 연행되었어요. 저는 연극 티켓 예매한 게 있어서 다녀왔는데 돌아와보니 김형수 지회장님이 지옥에서 올라온 투쟁가가 되어 계신 거예요. “동지들! 분노합시다! 저런 공권력은 경찰이 아닙니다! 오늘 거제 내려가려 했습니다! 윤석열이 때려잡고 거제 내려가겠습니다!” 그러고 꼰벤뚜알 수도원에서 회의를 하고 계셔서 가서 손을 꼭 잡고 인사를 드렸어요.
그렇게 한강진이 마무리되고 거제로 돌아가신 다음에 이 분들을 언제 또 볼까 싶었는데 이틀 뒤에 서울에서 상경투쟁을 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천막 치는 것 좀 거들자 싶어서 퇴근 후에 가고 있는데 용역이 왔다는 거예요. 가자마자 용역이랑 또 싸웠죠. 그런데 그 와중에 김형수 지회장 동지가 들고 있는 돌돌 말린 매트를 용역이 못 가져가게 하니까 이게 ‘시금치 페스토 샌드위치’라고, 먹을 거라고 자꾸 우기는 거예요. 용역이 먹어보라니까 막 먹는 시늉 하고. 저는 그걸 보면서 지회장이라는 사람이 술을 먹고 현장에 왔나 싶었어요. 거의 용역이랑 술래잡기를 하더라고요.
요지경
저도 그 자리에 있었어요. 진짜 긴급한 상황이고 되게 안 좋은 상황이었는데, 지회장님 혼자 약간 모든 것을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듯이, 만담가처럼요.
맘마
우린 뒤에서 PD수첩인데 앞에서 혼자 코미디 빅리그를 찍고 계셨죠. 저 사람은 진짜 뭐지 하고 있는데 갑자기 또 화단에 올라서서 용역들한테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자본에 영혼을 팔지 말라고요. 진짜 멋있었어요. 그날 결국 추위에 달달 떨면서 밤샘을 하고 오픈 마이크를 하기도 했어요. (이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연이 끝날 줄 알았는데, 구미 옵티컬 희망텐트에서 또 만났죠. 근데 거기서 형수 동지가 제가 전장연 연대 자주 가는 걸 아니까 저한테 연결을 해줄 수 있냐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연결을 해서 1월 13일 거통고 문화제가 처음 열린 날 같이 혜화를 갔죠. 그런데 거기서 같이 죽을 뻔했어요.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배를 만들거라는 거예요.
장혜영
무지개 조선소 말씀이시군요.
맘마
그때는 그런 말은 안 쓰고, 그냥 다짜고짜 배를 만들어야겠대요. 그래서 아 역시 조선소라서 배를 만드나보다, 막 광장에 끌고 다니시려고 하는 거냐고 물어보니까, 그렇대요. 그래서 진짜 멋있겠다 이러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걸 제가 같이 만드는 거였더라고요.
장혜영
어쩐지 전장연 박경석 대표님이 연상되네요.
|
|
|
2025년 2월 8일, 서울 한화 빌딩 앞에서 진수식을 진행한 전국금속노동조합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연대투쟁호’ (사진 출처: 거통고조선하청지회 트위터 계정) |
|
|
2025년 2월 15일, 거리를 행진하는 '연대투쟁호' (사진 출처: 거통고 조선하청지회 김형수 지회장 트위터) |
|
|
무지개 조선소 작업반장,
거통고 조선하청지회
신규 조합원 되다
맘마
네. 그리고 그날 좀 속 깊은 대화를 처음 해봤어요. 그날 전장연 현장에서 거통고 동지들이 노조 조끼를 입어서 그런가 더 강하게 진압당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한 동지는 정말 목졸려 죽을 뻔했고요. 연결한 사람 입장에서는 그게 너무 미안한 거예요. 그래서 문화제 진행하고 오픈마이크 하는데 형수 동지랑 얘기를 좀 했어요. 내가 너무 섣부르게 한 것 같다고. 선배들은 지금까지 잘 싸워온 사람이고, 당연히 나보다 잘 싸우고, 정말 오래 해온 사람들이라는 걸 알기에 괜찮다고 대답할 것도 알지만 어쨌든 몸이 축나는 일인데, 그리고 자기 투쟁도 있는데 너무 섣불리 연대를 요청한 것 같아서 마음이 너무 안 좋다고 하니까 오히려 일종의 세미(semi) 갈? 꾸지람?을 받았어요.
노동조합 하는 이유가 이건데 연대는 당연한 거다. 그리고 내가 먼저 예은 동지에게 연대를 가겠다고 요청한 거니까 신경쓸 필요 없고, 전장연 투쟁은 진작 알고 한번 연대를 하고 싶었는데 서울 올라온 김에 한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얘기하시는 걸 보면서 여기 진짜 괜찮은 곳이라고 느꼈죠.
그리고 그날 ‘꼰대 되지 않는 법’이라고 해서 약간 명문화된 평등수칙을 만들고 싶어하셨어요. 꼰대라는 말도 어찌 보면 혐오표현일 수 있으니까 ‘평등을 위한 언어 수칙’ 이런 걸로 하자고 하면서. 그날 다같이 밥을 먹으면서 ‘이런 말은 듣기 싫다’ ‘년’이라든가 욕이라든가 동물을 비하의 표현으로 쓰는 말, 그리고 무슨 ‘밍아웃’ 무슨무슨 ‘라이팅’ 이런 것도 되도록 안 쓰면 좋겠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그런데 조합원 동지들이 ‘아 뭐 이런 것까지 하냐’는 반응이 아니라 그걸 왜 쓰면 안 되는지를 다 물어보셨거든요.
요지경
평등 수칙은 원래도 계속 있어왔지만, 거통고 투쟁 사업장을 계기로 다른 투쟁사업장에 계속 실질적으로 퍼지면서 전반적으로 말벌 동지들이 연대에 가는 환경에는 평등 수칙이 기본적으로 통용되는 환경이 좀 유지되고 있어요.
맘마
그 외에도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제가 지적하고 말했을 때 곧바로 피드백이 되는 걸 많이 경험했어요. 혐오발언이 있거나, 아니면 상대를 좀 타자화하거나 잘못 패싱할 때도 바로바로 지적하고 고칠 수 있는 분위기가 계속 되어서 퀴어들도 되게 편안한 마음으로 연대를 할 수 있는 환경이었어요. 그리고 단순히 그냥 오늘 이런 얘기가 나왔으니 조심합시다 수준이 아니라 이게 왜 불편한지 다같이 얘기하고, 그럼 어떻게 할지를 다 같이 정하고, 그걸 다음날 작업할 때 공지하면서 계속 이어지게 하고 그걸 또 SNS에 올리기도 했어요. 문제 해결을 원하는 당사자에게 사과문을 보내기도 하고.
장혜영
그런 것은 리더가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추진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까요?
맘마
다른 조합원 동지들도 의지가 있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번거로울 수 있잖아요. 왜냐면 그런 거 하나하나 낯서니까. 예를 들면 저희가 조선소 하청노동자 작업 잘 모르는 것처럼 그분들도 사실 비건이나 비거니즘의 종류 같은 것들을 잘 모르실 수 있죠. 특히 용어들이 다 영어다보니까요. 성소수자 관련 용어들도 퀴어, 앨라이, 트랜스젠더, 옴니섹서.. 저도 헷갈리는 것들이요. 하지만 열심히 알려고 노력하셨어요. 계속 물어보기도 하고.
요지경
김형수 동지는 유명한 퀴어 앨라이기도 하세요. 저희가 거제 내려갔을 때, 고태은 동지라고 호각에서 활동하는 동지가 성중립 숙소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거통고 쪽에서 바로 OK를 해서 원래 숙소로 쓰기로 한 한 곳을 성중립 숙소로 바꿔서 운영을 했대요. 그런데 그 공간이 거통고 사무실이었고 이미 무지개 깃발이 걸려 있어서 퀴어 동지들의 마음이 따뜻해졌다고 들었어요.
맘마
그러다가 무지개 조선소가 열렸죠.
장혜영
그 배는 결국 같이 만드신 거죠?
맘마
제가 작업반장이었죠. 설날에도 집에 안 가고 2주 내내요.
요지경
되게 열심히 했어요.
맘마
그렇게 무지개 조선소를 만들고, 계속 회의하고 뭐 그런 과정에서 일도 많이 꾸미고 연대도 다니다보니 어느새 주변에서 다들 ‘상근자 아니세요?’ ‘상근자 아니셨어요?’ ‘조합원인 줄 알았어요’ 이런 말들을 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일단 아니라고 했어요. 왜냐면 거기서 제가 ‘아 그래요?’ 해버리면 실제 활동가들이나 상근자들에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조합원은 고민이 되는 거예요. 진짜 가입할 수 있으면 가입 하고 싶어서요.
요지경
그리고 그때쯤 실제로 가입을 한 분이 계셨어요. 저도 그 얘길 듣고 가입을 했고요.
맘마
그래서 저는 일단 형수 동지에게 물어봤어요. 내가 연대 시민의 위치에서 거통고에 함께 있는 게 더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조합원이 되는게 도움이 되는지를요. 한 2주쯤? 이게 조합원이 된다는 게 그냥 형수 동지가 오케이 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거제에 있는 다른 조합원 동지들하고도 합의가 돼야 정말 구성원으로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그랬어요. 그래서 원래는 재판 이후에 생각을 해보기로 했어요.
장혜영
22년 대우조선해양에서 옥쇄투쟁파업 하던 때의 투쟁에 대한 업무방해죄 1심 선고였죠?
맘마
네. 2022년 여름의 51일 파업에 대한 거요.
요지경
그때 다들 실형이 나올 걸 예상을 했었죠.
맘마
정말 법정 구속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제가 형수 동지한테 그런 말을 했어요. 정말 법정 구속이 되면 사람이 빠지게 되는 건데, 투쟁은 계속 이어져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만약 재판 잘못돼도 걱정하지 마라, 내가 조합원 가입하겠다고 하니까 형수 동지가 갑자기 ‘그래? 재판 잘못 돼야겠네’ 그러는 거예요. (웃음) 그래서 재판 끝나고 가입신청서를 내겠다고 했어요. 인터넷으로 하는 건 싫고 중요한 건 서면으로 하는 게 좋아서요.
요지경
사실 폼으로도 받고 계세요. 저는 재판 이전에 인터넷 폼으로 제출을 했고, 다른 분들도 많이 그렇게 하셨어요.
맘마
신청서를 써놓고 재판에 들어가서 부적처럼 왼쪽 가슴팍에 넣어놓고 있었어요. 그런데 딱 처음에 선고를 하는데 ‘김형수’ 한 다음에 집행유예 4년, 그러는 거예요. 징역은 3년이고요. 일단 법정 구속은 아니라 가슴을 쓸어내리고 밖에서 기자회견 끝나자마자 신청서를 제출했죠. 그런데 그리고 9일 뒤에 제가 지혜복 선생님 투쟁에 연대하다 서울시교육청에서 연행을 당했고, 조합원 되고 한 달이 안 돼서 형수 동지가 저기(서울 중구 한화 본사 앞 CCTV 30미터 높이 관제탑) 올라갔어요.
|
|
|
투쟁 머리띠를 하고 '트젠' 머리띠를 김형수 거통고 지회장에게 묶어주는 '맘마 동지' (사진 출처: 송예은) |
|
|
'맘마 동지'가 '거통고 조합원'이 되던 날 (사진 출처: 송예은) |
|
|
12.3 계엄 이전의 삶
장혜영
이 모든 얘기가 마치 여기로 올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많은 장면을 압축적으로 얘기하게 됐는데요. 이쯤에서 묻지 않을 수 없네요. 12월 4일에 처음 광장으로 나오기 이전에 ‘맘마동지’ 말고 ‘송예은’의 삶은 어떤 삶이었나요?
맘마
어떤 운동이나 사회의제에 관심이 아주 없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니까 그냥 답답하기만 하고.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윤석열이 대통령 된 다음에 너무 화가 나는데, 한낱 개인인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뭔가 정당에 가입하고 싶은 마음은 안 들었어요. 정치권에 대한 신뢰도 없었거든요. 그렇다고 무슨 단체에 들어가는 것도 좀 꺼려졌고요. 거통고가 진짜 이례적이었어요.
장혜영
왜 그렇게 단체에 소속되는 걸 안 좋아하셨어요?
맘마
아마 운동부 때의 기억 때문인 것 같아요. 내가 거스를 수 없는 규율 같은 게 있고, 그 단체에 들어가기 위해 나의 어떤 중요한 부분을 포기하든지 나의 어떤 정체성이나 자아를 숨기거나 깎아내려야 하는 상황들이 너무 싫은 거예요. 지금처럼 투쟁을 하느라 취미생활을 줄이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죠. 그리고 제가 사람은 좋아하는데 인간을 싫어해요.
장혜영
아아
맘마
그리고 약간 그런 루머들 있잖아요. 인권단체들이 다 북한이랑 연관돼있다는 둥.. 그런 루머가 너무 많아서 어딜 들어가야 할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다니던 학교에 어떤 인권동아리 같은 게 있는 편도 아니었고요. 그러다 계엄이 터지고 뭐 이제 핑계댈 것도 없고 일단 나가보자고 하게 된 거죠.
다만 일종의 부채감이 있었어요. 파리바게뜨 노조 임종린 지회장 투쟁을 되게 인상깊게 봤어요. 화섬노조 파리바게뜨 소식 올라올 때마다 울고요. 너무 속상했어요. 그 모든 일련의 사건들, 그리고 이후의 처리과정이요. 아니 사람이 그 여름에 50일을 넘도록 굶고 있는데. 저는 사람 정말 죽을 뻔했다고 생각해요. 운동 때문에 밥 많이 굶어본 사람으로서, 그건 정말 사람이 할 짓이 못 돼요. 그걸 어떤 불매운동이라는 방식의 연대로 그 단식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게 인상적이었어요.
22년도에 윤석열이 대통령 되고 제가 기억하는 것 중 하나가 화물연대 파업이에요. 근데 그때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서명 뿐이었어요. 그때도 인스타에 글을 올렸는데, 파업 욕하는 애들이 있으면 그따위로 살지 말라고 댓글도 달았지만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어요. 제가 무슨 화물 회사 주주도 아니고. 뭔가 그렇게 개인인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사안들이 끊임없이 밀려오는데 이걸 모른 척 하고 살기엔 이미 다 알고 있고. 뭔가 하긴 해야 하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상태로 있다가 계엄이 터진 거예요. 거통고 투쟁도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어요. 제가 처음 연극했던 게 <보도지침>이었거든요. 22년 상반기에 준비를 해서 올렸는데 그때가 딱 거통고 투쟁 할 때였어요.
장혜영
맞아요. 여름에. 저도 현장에 갔었어요.
맘마
근데 거기 그런 대사가 있어요. 왜 노동자는 공장 굴뚝에 올라서 100일, 300일, 500일이 되도록 못 내려 오느냐. 그래서 관련 자료를 검색하는데 거통고 소식을 보고 아직도 이렇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요. 이제 보면 참 인연이죠. 전 진짜 거제랑 연이 없는데.
장혜영
원래 고향이 어디세요?
맘마
경기도요.
장혜영
상당히 남쪽으로 가셨네요.
맘마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그냥 같이 싸우고 싶은 사람들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형수 동지랑 투쟁하는 게 좀 재미있었던 것도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인 것 같기도 하고…저는 진짜 단체도 없고 그 흔한 인권동아리 활동도 안 해봤고, 집회도 굳이 따지자면 퀴어퍼레이드 가본 게 다인데 다들 지금은 엄청난 운동권인 줄 알고 있어요.
장혜영
사실은 계엄 이후에 엄청난 고도압축성장을 하신 거네요.
맘마
그런데 주변에서 오래 본 친구들은 ‘그럴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장혜영
그건 무슨 뜻이에요?
맘마
사회 문제나 이런 얘기 할 때는 조금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편이었거든요. 보통 친구사이에는 사실 정치적인 주제에 대한 생각을 열심히 말하진 않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냥 누가 파리바게뜨 가서 빵 사려고 하면 “어 거기 SPC라서 안 먹는데” 라고 말하는 쪽이었어요. 인터넷에도 그런 걸 자주 올렸고. 그래서 주변에선 놀라지 않는 분위기였어요.
장혜영
운동의 백그라운드가 아주 없었다기보다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있다가 계엄을 계기로 현장과 직접 깊이 관계를 맺게 된 거네요. 그럼 민주노총에 대한 호감도 비슷한 맥락으로 갖게 된 건가요? 사람들 고정관념으로는 노조에 대해 기본적인 편견을 갖는 경우가 많잖아요.
맘마
예전에 쿠팡에서 알바를 했는데, 노조가 생기기 전이었어요. 그때 진짜 죽을 뻔했어요. 그 다음에 우체국 물류센터 알바를 갔는데 거긴 노조가 있었어요. 거기가 너무 천국 같은 거예요. 쉬는 시간 다 지켜주고. 근로계약서 진짜 꼼꼼히 쓰고 핸드폰도 쓸 수 있게 해주고 휴게실에 온돌도 깔려있고. ‘노조가 나를 살리는구나’ 싶었죠.
장혜영
피부로 노조의 존재 이유를 느끼셨네요.
맘마
그쵸. 내가 최저시급이라도 받는 것은 노조 덕분이다. 내 최저시급 인상 투쟁은 국회가 아니라 노조가 해준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리고 12.3 계엄날 진짜 나갈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금속노조 성명문을 봤어요.
장혜영
금속노조가 선봉에 선다.
맘마
맞아요. 금속노조가 선봉에 서면 나는 좀 뒤에 있어도 되지 않을까? (웃음) 금속노조가 욕을 많이 먹는 이유는 뭐 과격하다든가 그런 거잖아요. 그런데 반대로 우리 편이면? 아주 든든하죠. 어쨌든 계엄 사태에 맞서는 건 폭력을 마주할 수도 있는 상황인 건데. 제가 싸워봐서 아는데 그럴 땐 잘 싸우는 사람 뒤에 있어야 돼요.
장혜영
격투에서 익힌 실전의 향기가 느껴지네요.
맘마
물론 저도 일대일 대치상황에서 아주 싸우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총은 다른 얘기죠. (웃음) 쌍차 투쟁에 대해서도 대략 알고 있었고요. 공권력의 억압을 심하게 받은 곳인만큼 그에 대한 대비책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거기에 그렇게 멋있는 입장문이 나와서
장혜영
또 사람을 설레게 만들고
맘마
맨날 광장에 금속노조 깃발 있으면 혼자 뒤에 어색하게 서서 ‘멋있다’ 이러고 있었어요.
요지경
제가 이 친구랑 행진을 많이 다녀봐서 아는데 처음엔 ‘멋있다’ 였지만 어느새 점점 금속노조 옆에 붙더니 어느날은 경찰이 길을 안 터줘서 민주노총이 앞으로 가야된다고 양경수 위원장이 그랬어요. 그러니까 금속노조가 와르르 가는데 갑자기 얘가 안 보이는 거예요. 보니까 얘 깃발이 금속노조랑 같이 맨 앞에 있었어요.
장혜영
두 분은 기수 대 기수로 만나신거죠?
요지경
처음에는 기수 대 기수이기도 했는데, 어쨌든 중간에 ‘트친’도 있어요. ‘하길’ 님이라고요.
장혜영
일리아스 깃발 든 유명한 기수분.
요지경
맞아요. 처음에 현장에서 만나고, 소개를 시켜달라고 해서 트친이 되고 계속 같이 다녔어요. 남태령에서 거의 내내 붙어 있었고, 한강진도 같이 가고 뭐 그 이후에는 계속 쭉 같이 다닌 것 같아요.
장혜영
두 분이 동지애가 싹틀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얼핏 보면 십년지기처럼 보여요.
요지경
10년 늙은 것 같기는 해요.
맘마
진짜 저는 실제로 늙었다고 다들 그러더라고요. 얼굴을 보면 평소 동료도 한 번 못 알아봐요.
요지경
그건 그건 좀 못됐다. 분위기가 달라서 그런 거지. 원래 분위기랑 완전 달라졌어요. 인스타 사진을 보여드려 봐. 진짜 달라요. 목소리도 원래 안 이랬거든요. 제일 처음 12월 발언을 보면 목소리가 되게 맑고 카랑카랑해요. 근데 지금 완전 목이 쉬어서.
장혜영
가족들은 뭐라고 하세요?
맘마
어떻게 보면 지금 이렇게 투쟁하느라 가족 관계에서 파업중이에요. 그런데 그게 막 속상하거나 힘들지는 않아요. 개인적으로 가족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어야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이 딱 아름다운 거리 같아요.
장혜영
생계는요.
맘마
뭐 이러저러하게 약간 일용직 같은 걸 조금씩 하고 있어요. 나와 있다 보면 친구도 안 만나고 취미생활도 안 하니까 돈이 그렇게 엄청 나갈 일은 없어요. 그리고 제가 곧 선수 계약금이 들어와서 그걸 또 투쟁 기금으로…
장혜영
태권도 선수를 계속하고 있는 건가요?
맘마
아니 그게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약간 일용직처럼 불러요. 지역 대회가 있을 때 용병으로 한번씩. 아니면 가끔 알바를 부탁할 때가 있어요.
장혜영
이제 이 인터뷰가 나간 후에 만일 사람들이 맘마 동지를 불러서 예를 들면 강의를 요청하고 싶다고 한다면 어떻게 연락드리면 돼요? 트위터 DM?
맘마
네 그게 제일 빠릅니다. 페이스북도 있어요. 페이스북도 ‘야생맘마먹음이보존협회’로 되어 있어요. 최근에 만들었어요.
|
|
|
<망원정담>을 위한 대담을 나누는 요지경 님, 맘마 님, 장혜영 망원정x 대표 (좌측부터) |
|
|
대담 중에 요지경 님이 언급한 맘마 동지의 '인스타 사진' (사진 출처: 송예은) |
|
|
사랑하는 '금속노조'
머리띠를 두르고 생긴 일들
맘마
근데 제가 발언할 때마다 금속노조 ‘샤라웃’을 진짜 많이 했어요. (샤라웃: 샤라웃(shout out)은 "외치다", "소리지르다"라는 뜻의 영어 단어로, 공개적인 언급으로 개인이나 팀의 성과를 알리고 공로를 인정하는 의도로 사용됩니다.)
요지경
맞아 그 한강진 오픈 마이크에서 금속노조 좋다고 공개적으로 사랑 고백을
맘마
거기 뿐만 아니라 거통고 다녀온 이후부터 제가 거제 가기 전에 전장연에서 그런 말을 했어요. 내가 거제 가서 전장연 투쟁 얘기 할테니까 여기서는 거제 투쟁 얘기 들어줘야 된다고요. 그러고 거제 가서 전장연 투쟁 얘기 하고 와서 다음날이 1월 2일 안국역 다이 인(Die-In)이었어요. 장혜영 전 의원님 발언하신 날이죠.
장혜영
맞아요.
맘마
그래서 저도 그때 거제 투쟁 얘기 들려드리고 거통고 구호를 전장연 구호랑 같이 했어요. 그리고 아침 선전전 발언 때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노조의 말을 인용했죠. 내가 부를 수 있는 게 금속노조 뿐이다. 그리고 금속노조 진짜 온다. 그만 하라고 했다. 금속노조 부른다. 그런데 진짜 와주셨어요.
요지경
실제로 금속노조 지도부 쪽에서 선전전에 와주셨어요. 그때 노트북으로 ‘진짜 옴’ 하고 들고 있었던 걸 금속노조 공식 계정에서 올려줬어요.
장혜영
진짜 기분 좋았겠네요.
맘마
아니 약간 당황스러웠어요. 얼굴이 너무 전면적으로 다 나왔거든요. 근데 뭐 사실 이미 그런 상태였죠. 그런 다음에 금속노조에서 시민 기고글을 한번 써주면 좋겠다 해서 글도 쓰고, 거기에도 금속노조 사랑 고백만 했죠. 나는 왜 금속노조를 사랑하는가.
장혜영
금속노조 분들 진짜 기분 좋으셨겠어요.
맘마
그래서 저를 강연 자료로 많이 쓰시더라고요. 홍보실에서도.
요지경
실제로 이번에 대의원 회의 대대였나에서 인터뷰 영상이 나오는데, 무지개 조선소 같이 했던 분들하고 같이 나와서 ‘금속노조 사랑해요’ 하는 영상이..
맘마
심지어 세종호텔 가서도 금속노조 사랑한다고 해서 그 뒤에 계시던 분들이 ‘여기는 세종호텔인데…’ 하셨어요.
그리고 비정규직 대행진 때도 첫 시민 발언이 저였거든요. 올라가서 ‘제가 제일 사랑하는 노조는 금속노조다’ 그랬더니 이제는 금속노조 분들도 ‘이 친구가 금속노조가 좋대’ 하고 알아봐주세요. 금속노조 지도부에서 전장연 오셨던 날에도 머리띠를 보고 저한테 어디서 나왔냐고 하시는 거예요. 그땐 조합원이니까 ‘그냥 좋아서 하는 거예요’ 그랬더니 ‘이 친구가 금속노조가 좋아서 금속노조 머리띠를 하고 다닌다잖아’ 하고 기뻐하셨어요.
그 머리띠를 현대제철 비정규직 지회 지회장님이 주셨거든요. 거기가 선봉대가 있는 곳이라서, 내가 이걸 두르고 있을 때만큼은 금속노조의 명예에 어울리는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어요. 그거 주시면서 그런 말씀하셨거든요. 이거 있으면 경찰이 안 건드리지만 끌려갈 땐 제일 먼저 끌려갈 거다.
장혜영
임팩트가 확실하네요.
맘마
좋았어요.
장혜영
인생이 많이 달라졌는데
맘마
많은 고민이 있었는데요. 제 자리를 찾은 것 같기도 하고.
요지경
유치장 다녀온 얘기도 해주세요.
맘마
아니 지혜복 선생님 투쟁 연대차 서울시교육청 앞에 있었는데, 연대자들을 연행해가더니 유치장에서 저를 독방에 가두더라고요. 심지어 진짜 오랫동안 활동했던 활동가분도 계셨는데 저만 독방에 가두는 거예요. 그래서 방 배정 기준을 물어봤어요. 있대요. 근데 말을 안 해줘요..
요지경
네가 전장연에서 너무 많이 채증을 당해서 혜화경찰서에 화보집이 있다잖아.
맘마
보통 사람들이 발언을 하면 시민들이 시민들을 보면서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항상 반대편에 올라가서 경찰한테 말을 했거든요. 그래서 약간 독방 갈 만 했나. 그런데 이 정도로 독방에 가두는 건 너무 쪼잔하지 않나 싶기도 했어요.
요지경
나는 너 독방 갔다고 해서 울었어. 경찰들이 갓 스물 넘은 사람이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독방에 가뒀나 싶어서 너무 서러운 거예요. 저는 그때 밖에 있었는데 갑자기 텔레그램 메시지로 ‘여기 큰일났다’고 하더니 10분 뒤에 다 잡혀갔다고 하는 거예요. 완전 멘붕한 상태로 퇴근 하자마자 경찰서로 달려갔는데, 체포 과정에서 불합리한 일이 많았고 수감 과정에서도 인권 탄압적인 부분이 꽤 있었다고 했어요. 트랜스젠더들에게 잘못된 행동을 한다든가, 아픈 사람들에게 야박하게 굴거나, 이 친구의 경우에 샤워를 다 하고 옷을 갈아입는데 남자 경찰이 그냥 문을 열고 들어왔다고 했어요.
맘마
근데 다행인 건 제가 민첩하게 옷을 빨리 갈아입었던 거고 최악이었던 건 그러고 나서 제대로 된 사과도 못 받았다는 거예요. 그냥 애가 좀 어리버리해서 그랬다 이러고 말더군요.
요지경
말도 안 돼. 그래서 연대자들이 그런 피해사례를 다 정리해서 상담도 하고 발표도 하는 자리가 있으면 좋겠다고 연행이 이뤄진 A학교 공대위 쪽에 부탁을 드렸고 지금 잘 되고 있어요. 상담도 진행중이고 피해 사례도 수집되고 타임라인도 제대로 만들고요.
근데 진짜 세상이 이 친구한테 너무 각박하게 군다는 느낌을 되게 많이 받아요. 투쟁 현장에서 되게 적극 나서기 때문에 적극 탄압도 받고 있어요. 저는 언론사에서 일해봤기 때문에 경찰이 진짜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아는데, 여러번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경범죄자들도 이렇게 대하지는 않아요.
맘마
사실 전장연 연대 건으로 제가 지금 검찰 송치돼있는 게 있어요. 벽에 스티커 2개를 붙인 ‘김맘마’. 사실 이 사건은 경찰서에서 조사하고 끝내도 되거든요. 벌금형을 때리든지 그냥 끝내면 되는데, 물어보는 거예요. 스티커 2개 붙였냐고. 그래서 내가 붙였다고 했죠. 왜 붙였냐고 해요. 아니 그럼 말도 못 하게 끌고 가는데 스티커라도 붙여야 할 것 같아서 붙였다. 그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지 않냐고 물어요. 정당했다고 대답했죠. 그러시냐고, 알겠대요. 그럼 거기서 사건 종결 처리하면 될텐데 이걸 굳이 서울중앙지검에 송치를 해놓은 거예요. 집에 서류 날아온 거 보면 ‘경범죄 처벌법’이라고 적혀 있어요. 걔네가 바라는 건 이 서류가 어디로든 도착해서 내 사회적 위신 같은 걸 위협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어요.
요지경
좀 위협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때 그 유치장 독방 건도 그렇고.
맘마
그런데 진짜 독방 들어가자마자 심심해서 종이랑 펜 달라고 해서 발언문 썼어요. 그랬더니 리틀 유시민이래요. 유시민 100분의 1 분량밖에 안 되는데.
장혜영
‘항소 이유서’ 말이군요.
요지경
그리고 나서 이제 석방되자마자 그 성북서 앞에서 그걸 읽었죠.
|
|
|
2025년 2월 12일 전장연 안국역 투쟁 현장을 찾은 금속노조 (사진 출처: 금속노조 트위터) |
|
|
2025년 2월 12일 전장연 안국역 투쟁 현장을 찾은 금속노조 (사진 출처: 금속노조 트위터) |
|
|
2025년 2월 26일 성폭력 없는 학교, 모두가 존중되는 사회를 위한 서울시교육청 집회 중 맘마 동지의 연대발언 현장 (사진 출처: 말빛 트위터) |
|
|
2025년 3월 1일 석방된 맘마 동지가 전날 성북서 유치장 독방에서 펜과 종이를 빌려 쓴 발언문 (사진 출처: 말빛 트위터) |
|
|
최근의 광장 분위기에 관해
장혜영
약간 얘기의 방향성을 바꿔서, 요즘 광장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특히 지난주에 헌재의 탄핵 선고가 있을 거라고 많이들 예상했잖아요.
맘마
연극 셋업 기간 같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셋업 기간은 무대를 만들어서 올리고 마지막 드레스 리허설 하고 그런 기간이에요. 제가 소속되었던 연극 단체에서는 배우들끼리 4주에서 5주의 연습기간을 가진 다음에 이제 최종 리허설을 겸해서 모든 스태프들이 다 같이 우리의 목표인 연극을 올리기 위해 일주일동안 이걸 해요. 그런데 그러면 어떨까요? 치고 받고 싸우죠. 하루종일. 지금이 딱 그런 상태인 것 같아요. 왜냐면 우리 모두 좋은 연극을 만들고 싶잖아요. 하지만 무대 팀은 무대 팀이 원하는 바, 음향 팀은 음향, 조명팀도 의상팀도 배우도 연출도 다 각각 개인이 집중하는 것은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지금 광장도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윤석열을 파면해야 한다는 데 모두가 동의하지만 왜 파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씩 생각이 다른 거죠. 그런데 서로 틀렸다기보다 서로의 세부적인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다보면 서로가 서로의 방해요소가 되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광장에서 이게 불편하고 저게 불편하고 나오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하지만 이게 더 안 좋은 쪽으로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다만 요며칠 광장이 조금 폭력적이라고 느꼈던 경험은 있어요. 저희 광화문에 비정규직 투쟁 사업장 공동 단위로 천막이 하나 있어요.
요지경
지난주에 쳤어요. 정확히는요.
맘마
다른 곳은 다 잘 되어 있었는데 저희는 일단 지붕만 달아놨었거든요. 그냥 거기서 노숙을 하는데 그 옆의 큰 정당 천막에 오신 분들이 우리 짐을 그냥 밟고 간다거나 자기들 행사에 집중하느라 우리 깃대를 막 치고 가는 일이 있었어요. 우리가 노조법 2, 3조 개정하라,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반도체특별법 폐기하라 이런 구호를 외치는데 옆에서 막 ‘꺼져라’ 이런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요. 이런 얘기를 SNS에 올리니까 소위 말하는 ‘좌표’가 찍혀서 사이버불링이 돌더라고요. ‘거짓말 하지 마라’ ‘니들이 먼저 방해한 거 아니냐’ 이런 식으로요.
다음날 우리가 오픈마이크를 하는데 옆에서도 오픈마이크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옆에서 발언할 때 우리가 노래를 틀거나 발언한다는 이유로 우리를 ‘극우인 줄 알았다’ ‘왜 싸우려고 드냐’고 하는 거예요. 그분들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드리니까 오해는 풀렸지만, 그러고 나니까 진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번에도 우리 차례가 아닌가? 그럼 도대체 노동자들이 몇 명이 죽어야 우리 차례가 오는 건가? 노동자들이 이렇게까지 죽어나가고 있는데 아직도 순서가 아니라고 하면 그 전에 죽은 노동자는 대체 누가 보상을 해 주나요. 물론 사람 목숨은 어떻게 해서도 보상이 되지 않죠. 그럼 이제 죽어갈 노동자는 누가 책임을 져줄 수있으며, 이런 문제를 정치권에 호소를 안 하면 도대체 어디에 말을 해야 되죠?
그때 제가 한 발언 내용이 이런 거였어요. ‘도대체 몇 명이 죽어야 우리 순서가 오는 거냐, 사람이 죽어간다는 소리에 어떻게 순서를 지키라고 할 수 있냐, 사람이 죽어가는데 어떻게 조용히 말을 할 수가 있냐, 그럼 도대체 우리는 이걸 외쳐야 되냐, 일터에서 외쳐도 아무도 안 듣고 동료가 죽은 곳에서 외쳐도 안 듣고, 그래서 서울로 올라왔는데 국회 앞에서도 안 들어주고 고공농성, 삭발투쟁, 오체투지, 단식농성 다 해봐도 안들어주더라, 그럼 도대체 우리는 어떤 언어로 어디서 어떻게 말을 해야 들어줄거냐.’ 제가 하필 딱 이런 얘기를 하는데 뒤에서 정치인을 연호하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그때 많이 비참했어요.
언제쯤 이렇게 조명 하나 없이 달랑 스피커 두 개에 의지해서 말하는 우리의 목소리가 국회에 닿을 수 있을까. 도대체 언제쯤 대통령이 하청 노동자 말을 들으러 우리를 직접 찾아올까. 그게 도대체 언제일까. 그날 제가 했던 발언은 분명 예전에 김진숙 동지도 똑같이 했던 말이에요. 며칠 전에 그 다큐를 봤어요. 그때도 결국 ‘더 이상 죽이지 말라, 하청 노동자를 살려내라’고 했는데 그걸 지금도 우리는 계속 똑같이 외치고 있어요. 그때 김진숙 지도가 고공에 올라갔듯 박정혜 소현숙이 올라가 있고, 고진수가 올라가 있고, 김형수가 올라가 있는 이 모든 것이 너무 비참한 거예요. 지금의 광장이 잘못하면 박근혜 때의 광장의 상처를 반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러지 않으면 좋겠어요.
장혜영
박근혜 탄핵 집회때 맘마 동지 나이가 어떻게 되었죠?
맘마
16살? 15살? 저는 사실 박근혜 탄핵 집회에는 나가보지 않았어요. 인터넷으로는 계속 봤지만요. 그때 선수를 하고 있어서 진짜 물리적으로 나갈 수가 없었어요.
장혜영
그랬겠네요.
맘마
다른 운동을 하고 있어서.
요지경
운동하다가 운동을 하게 된 계기.
모두
(웃음)
|
|
|
2025년 3월 12일 거통고x세종호텔x지혜복 투쟁 긴급 오픈마이크 천막 현장 (사진 출처: 김형수 지회장 트위터) |
|
|
2025년 3월 20일 고공농성자 김형수, 박정혜, 소현숙, 고진수가 함께 낸 성명문 (사진 출처: 김형수 지회장 트위터) |
|
|
탄핵 이후의 광장에 바라는 점,
그리고 나의 각오
장혜영
석달 반의 광장의 시간동안 말벌시민들 사이에도 일종의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으로 저는 보여요. 그 규모가 대략 어느 정도라고 보세요?
요지경
사람마다 추산이 좀 달라요. 그리고 어느 범위까지를 말벌 시민이라고 정의할 것인지도 조금씩 달라요.
장혜영
요지경 님 관점에서는요?
요지경
저는 말벌시민이라고 하면 한 1천에서 2천명 정도 되는 큰 규모로 보고 있어요. 다른 어떤 분들은 투쟁 사업장에 연대하는 시민들을 기준으로 한 100여명 정도로 보시는 분들도 계세요. 저는 이 분들이 모든 현장에 다 오지 못하더라도 언제든 그럴 마음이 있고, 또 언제든 남태령 집회 같은 큰 사건이 있으면 뛰쳐나올 분들이기 때문에 좀 더 넓게 봐야 하지 않나 싶어요. 실제로도 그런 확장성을 바라고 있기도 하고요.
맘마
저도 이런 관점에 좀더 동의해요. 전장연에 연대하시는 시민 분 중에서 외국에 거주중인 분이 계신데, 그분은 전장연 아침 선전용 라이브 시간에 맞춰서 항상 그걸 보면서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서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트위터에 올려주세요. 그 분은 그런 식으로 계속 아침 출근길 선전전에 함께 하고 계신 거죠. 저는 그분들도 그냥 다 말벌시민이라고 생각해요.
장혜영
공감이 되네요. 이런 소중한 말벌시민의 연대가 탄핵 이후에도 유의미한 사회변화의 동력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요.
이제 윤석열 탄핵이 반드시 된다는 전망 하에서, 우리의 광장의 시간이 일단락된 이후의 이야기로 이제 조금씩 마무리해볼까 싶어요. 탄핵 광장이 마무리되어도 계속 곳곳에서 싸우는 투쟁 현장들이 있잖아요.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앞으로의 광장 혹은 말벌 시민들, 혹은 모든 동료시민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리고 새롭게 다가올 시간을 맞이하는 나의 각오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맘마
사실 탄핵이 되고 나면 당연히 지금 우리가 광장이라고 부르는 집회의 규모는 축소될 수밖에 없겠죠. 활동가도 시민들도 지난 3개월간 말은 안 해도 모두 지쳐있기 때문에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을 거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진짜 주말로요. 휴식이 있는 주말.
그런데 이 과정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을 알게 됐잖아요. 그러면 일상으로 돌아가고 쉬면서도 분명 불편한 마음이 어딘가 한구석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너무 죄책감을 갖지 않길 바라요. 하지만 관심은 계속 가져줬으면 좋겠어요. (웃음) 당장 그 사업장이나 투쟁 현장에 못 오는 것에 대해서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를 바라지만, 투쟁의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현장 밖에 있는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도 너무나 중요하니까 일상 속에서 한번씩 떠올려주고, 검색해주고, 지켜봐주시면 너무 고마울 것 같아요.
사실 거통고 투쟁도 22년도 파업이 되게 커서 많이 알려진 거지만, 윤석열 정부에서 내내 싸웠고, 박근혜 정부 때도 문재인 정부 때도 계속 싸우고 있었어요. 세종호텔 같은 경우에도 지금 몇십년째 투쟁을 하고 있고, 옵티컬도 지금 막 새로 생겨난 사업장이 아니잖아요. 이 모든 투쟁이 다 오래되었고, 전장연도, 전장연이야말로 정말.
요지경
2004년부터였죠.
맘마
그러니까 이제는 서로 ‘모르지만 아는 사이’가 되었으니까, 1년에 한번씩이라도, 신년이든 크리스마스든 생일날이든 한번씩 관심 가져주시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의 각오는… 이제 조합원이니까 조직의 카피를 따르겠습니다. “거침없이 통 크게 가자!”
장혜영
거. 통. 고(Go). 로군요.
요지경
김형수 동지가 만들었어요.
맘마
저는 이 말도 좋지만 형수 동지의 다른 말도 좋아해요. 22년에 한 말로 기억하는데, 노동자가 세상을 바꾸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저도 발언에서 자주 했던 말이고요. 세상을 움직이는 유일한 존재는 노동자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제대로 한번 움직여볼 수 있지 않을까. 꿈은 크게 가지라고 하잖아요.
장혜영
그 말을 들으니까 왠지 ‘민주주의’가 뭐냐고 묻고 싶어지네요.
맘마
민주주의요. 정말 좋은데 정말 힘든 것. 하지만 힘듦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혜영
말벌시민이자 이제는 거통고 신입조합원인 송예은 동지의 꿈은 무엇인가요?
맘마
일단은 진짜 ‘노동 해방 세상’이요. 이렇게 말하면 좀 추상적이고 먼 미래처럼 보이잖아요. 유토피아처럼. 그런데 진짜 그런 세상의 초입에라도 닿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함께하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 노조법 2, 3조 개정부터 차별금지법 제정까지 열심히 활동하고 싶어요. 그리고 저는 원래 배우 지망생이었잖아요. 지금은 약간 모호해졌지만, 어쨌든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어떻게 보면 공격을 당하기 쉬운 직군에 있었죠. 그런 직군을 포함해서 어떤 직업이든지 노조 활동을 한다는 것이 약점이 되지 않는 세상이 오면 좋겠어요. 하다못해 윤석열 탄핵 반대하는 사람들도 당당하게 회사에서 그런 말을 하는데!
요지경
시달린 게 많죠.
맘마
제가 알바하는 곳 사장님이 그러셨거든요. 사실 저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아직 집에 금속노조 가입했다는 말을 안 했어요. 아버지가 금속노조를 싫어하세요.
장혜영
콕 집어 금속노조만?
맘마
다 싫어하지만 그중에서 금속노조를 제일.
장혜영
선봉이니까.
맘마
네. 그래서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이 숨겨야 하는 일이거나 약점이 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 민주노조를 사수해야 합니다!
장혜영
멋진 꿈에 연대합니다. 투쟁! 여기에 덧붙이실 말씀이 또 있을까요?
맘마
이건 제 개인적인 바람인데요. 요즘 전장연 아침 선전전에 사람들이 적어지니까 또 강제 폭력 퇴거를 하려고 간을 보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요즘 열심히 다시 나가려고 하니까,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장혜영
맞아요. 끊이지 않는 연대가 중요하죠. 오늘 대담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신 요지경님께도 같은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요지경님이 생각하시는 민주주의와 요지경님의 꿈이 궁금합니다.
요지경
저는 민주주의는 도구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맞지만 그 자체에 너무 집중하기보다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세상에 집중하는 게 더 맞는 것 같아요.
제가 원하는 세상은 평등 세상입니다. 모두가 같은 위치에서 평등하게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사회를 꿈꿔요. 그건 정말 어렵지만, 그래도 우리가 힘써 나가는 과정에서 사회가 아름다워질 거라고 생각해요. 노동 해방도 평등 세상에서 가능하잖아요. 그래서 그 과정에서 노동자 민중이 함께 해야 하죠. 저는 최근에 여성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변혁적 여성운동 네트워크인 ‘빵과 장미’에 가입을 했어요.
장혜영
오늘 여러 얘기 들려주시고 함께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이 글을 읽으시는 망원정x의 독자 여러분께도 많은 울림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제 또 현장에서 뵙겠습니다. 투쟁!
|
|
|
"거침없이 통크게 GO!" "잼투" (사진 제공: 송예은, 사진 촬영: 김사저)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