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영
공간이 아름다운 것도 아름다운 거지만, 단순히 예쁜 바를 만들자는 것에서 나아가 여성 퀴어들을 위한 공간이라는 공적인 목표를 세우셨잖아요. 어떻게 해서 그런 기획이 나오게 됐는지 궁금해요.
도토리
퀴어 여성들이 온라인에서 결집하고 목소리를 내는 건 많이 흔해졌잖아요. 그런데 오프라인에서는 아직 폐쇄적인 느낌이 조금 있어요. 퀴어 퍼레이드나 집회, 모임, 세미나 같은 상황 외에도 일상에서 직접 만나서 목소리를 모으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더라고요. 우리의 정치적 역할을 상기해 볼 수 있는 일상 공간. 연속성 있는 프로젝트를 꾸릴 공간. 이런 큰 틀을 잡고 매물을 찾았어요.
장혜영
공간의 성격을 여성 퀴어 전용으로 규정하신 의도는 무엇인가요.
도토리
여성 퀴어를 위한 공간이 수요는 되게 많은데, 공간 수 자체가 적은 편이죠. 그래서 좀 더 선택지를 드리고 싶다는 맥락에서 퀴어 여성을 위한 공간으로 출발을 했고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퀴어 여성들끼리만 놀러 다니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앨라이와 함께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확장을 하게 됐어요.
장혜영
그때 저희한테 연락을 주셨던 날짜가 무려 2024년 10월 25일이었더라고요. 거의 석 달이 지난 셈인데, 실제로 공간 운영을 해보니 어떠셨나요?
젠
솔직하게 쉽지 않았습니다. (웃음) 자리를 잡아가는 시점에 계엄이… 정치적 기능을 하는 것과 사업성을 같이 가져가는 게 쉽진 않지만, 원하는 공간의 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이왕 하려던 걸 제대로 해보자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상황이에요.
도토리
하고자 했던 기획들이 생각보다 제대로 진행되진 않았어요. 퀴어 웨딩이나 전시도 신청자가 없었고. 생각보다 쉽게 봤다는 반성을 했죠. 홍보를 좀 더 열심히 해야 했고. 자영업이 처음이다 보니까. 기획에 시간 투자를 좀 못 했던 것 같아요. 차차 적응이 될 즈음 연말 맞이 이벤트로 12월에 생리대 후원 기부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바로 계엄이 터지면서… 참여율이 많이 저조했어요. 여러모로 배우고 있는 시기인 것 같아요.
장혜영
너무나 소중한 홍대 여성 퀴어 공간의 탄생을 축복해 주지는 못할망정 대한민국 정부가 자영업자에게 심대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어서… 한 사람의 정치인으로서 굉장히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고요. 공간을 운영하는 자영업자이자 소수자의 정치적 목소리가 가시화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사람으로서 12.3 계엄이라는 초유의 사건을 어떻게 겪으셨는지, 또 내란 수습 과정의 광장에 늘 무지개가 휘날리는 걸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해요.
도토리
일단은 퀴어 퍼레이드 외에 이렇게 무지개가 많이 흩날리는 광경을 보기 힘들잖아요. 개인적으로도 좀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늘 존재해왔던 사람들인데 이제서야 조명을 받는 느낌? 이 사람들이 어딘가에 소외되어 있거나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라, 같은 동료 시민으로 광장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있는 장이 된 것 같아서 그 부분이 의미 있었던 것 같아요. 계엄이라는 것 때문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요. 정체성 정치라든지 가시화 이런 것들이 되게 돋보였던 집회였던 것 같고요.
저희가 상황을 보고 생각했던 건 일상 속에서 정치적인 크고 작은 활동들을 지속해서 하는 게 되게 중요하다는 것이었어요. 지금까지 지속해 왔기 때문에 지금 이 광장에서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무지개 깃발을 휘날리고 이런 게 가능한 거니까요. 만일 광장에서 사람들이 흩어지더라도, 계속해서 삶 속에서 일상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게 카프에서 저희가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이랑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단체나 집단에 속해 있지 않더라도 저희처럼 편하게 방문할 수 있는 공간에서도 그런 기회를 접하게 되면 좀 더 정치적 의제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젠
성소수자들의 프라이드가 많이 돋보이게 됐다는 걸 느껴요. 예전엔 좀 소극적이었다면 지금은 좀 더 우리를 드러내고 있어요. 거기에 목소리낼 사람들도 준비돼있고, 모두가 연대할 마음도 준비가 돼 있다는 느낌? 목소리를 좀 더 크게 드러낼 수 있는 매체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죠. 좀더 커다란, 메이저 매체를 좀더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렇다면 좀 더 발전된 가시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주요하게 논의되어야 할 대상이 우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장혜영
성소수자들의 정치적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가시화됐다는 것은 정말 맞죠. 작정하고 말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어떤 분은 SNS에서 “올해 퀴퍼는 겨울이야?”라고 농담을 하기도 하시던데.
그리고 이런 적극적인 가시화는 정치적으로 영리한 선택이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퀴어 의제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죠. 하지만 적어도 계엄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수습해 가는 과정에서는 퀴어도 민주공화국을 함께 지켜 나가는 동료시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읽어낸 퀴어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을 보며 일종의 상쾌함이 있었어요. 이 경험을 계기로 그 이후의 맥락을 어떻게 이어갈지는 현재진행형인 것 같고요. 광장을 경험한 이들이 늘 광장에만 사는 것은 아니니까요. 모두에겐 일상이 있고, 그 일상에 카프 같은 공간이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까 도토리 님이 잠깐 얘기를 해 주셨는데, 지금 카프라는 공간의 쓰임새를 넓혀가기 위해 어떤 노력이 더 필요할까요? 예를 들면 집회 끝나고 모두 어디선가 뒤풀이를 하잖아요. 그런 공간으로 쓰일 수도 있겠고요.
도토리
마침 한창 탄핵 집회를 할 때가 제일 추웠잖아요. 그래서 저희가 이번 계엄령 터진 직후에 어떻게 이 공간으로 도움을 줄까 생각을 하다가 멀리서 오는 분들이 집회 후에 머물 거처를 못 찾아두신 경우에 무료 쉼터로 개방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었어요. 그런데 그마저도 신청자가 단 두 명이었고 실제 사용하신 분은 한 분밖에 되지 않았죠. 그리고 집회 참여자분들한테 무료 안주 서비스를 드린다든지, 저희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 퀴어 바에서도 집회 참여를 독려하는 이벤트들을 했어요. 한마음이라는 게 감동이더라구요. 쉼터 실 사용자가 적었다는 게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한 명이라도 이용해 주신 것에 대해 뿌듯함을 느꼈어요. 되게 추운 날이었는데, 큰 배낭을 메고 깃발을 들고 오신 거예요. 보람 있었죠.
젠
저희도 이제 운영에 루틴이 생겼고, 이제는 심적 여유가 생겼기 때문에 다시 다양하고 재밌는 정치적 기획들을 좀 적극적으로 해볼 예정이에요.
도토리
일단은 사람을 많이 모으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도 했어요.
젠
정치적 활동이라고 하니 아무래도 부담을 느끼는 분들도 좀 계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좀 허들이 낮은 것부터 시작해서 좀 더 큰 정치적 모임으로 거듭나길 바라고 있어요.
도토리
집회나 특정 사건에 국한돼서는 아무래도 물리적 거리가 있기 때문에 한계가 있죠. 그래서 장기적으로 이 공간을 통해서 각자의 정치적 역할을 탐구할 수 있는 여러 단체나 활동가를 소개하는 자리를 만들려고 하거든요. 예를 들면 자신의 업과 관련된 경우, 원래 하던 일에서의 확장이라고 하면 허들이 낮잖아요. 예를 들면 여성 퀴어 분들 중에 디자인이나 예술 관련 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신데, 정치적 디자인을 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아, 내가 하던 일을 통해서 이렇게 정치에 기여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해 보실 수도 있겠죠. 꼭 광장에 나가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내 역할을 찾을 수 있는 기획을 준비하고 있고요.
결과적으로, 활동가를 만들어내는 공간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다만 동료 활동가를 양성하는 차원이기 때문에 섭외가 쉽지 않고 시간이 필요하겠죠.
장혜영
그 부분에서는 저희가 충분히 도움을 드릴 수 있겠네요. 여러 분야의 활동가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만 지금 말씀하신 기획은 공익사업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네요.
젠
저희가 농담으로 “이건 자선 사업이다”라고… (웃음)
도토리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카프를 알리는 게 당장의 숙제예요. 상반기 내로 SNS 팔로워 5000을 넘기는 게 목표예요. 그래야 기획도 널리 알릴 수 있고요. 퀴어 결혼식 무료대관, 퀴어 아트 무료 전시도 야심 차게 준비했는데 공간 홍보 자체가 아직 너무 안된 것 같아요. 많은 신청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웃음)
젠
업장은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 인근에 있고요. 연락은 caff.seoul@gmail.com 혹은 인스타그램 @caff_seoul 디엠으로 부탁드립니다. 거의 1초 만에 답장을 드립니다. (웃음)
장혜영
여성 퀴어 공간의 하나의 미래로서 카프의 계획, 그리고 고민이 있으시다면 나누어 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도토리
지금 당장 현실적인 고민은 공간 운영 기간이에요. 단기 프로젝트가 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기왕 자선사업이라면 해볼 건 다 해 보고 이 공간을 여러 사람들이 활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죠. 돈은 어차피 나가는 거고. (웃음) 그러다가도 다른 분들이랑 협업을 하면서 또 방향을 새롭게 설정할 수도 있는 거고. 일단 실행부터 하자는 생각입니다.
장혜영
올해 안에 이 공간의 가능성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겠네요. 그런데 공간의 위치를 마포로 선정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도토리
마포가 아무래도 여성 퀴어 친화적인 지역이니까요.
젠
그렇죠. 203040 여성들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기도 하고요. 직장인도, 학생도 접근하기 좋고, 퀴어 관련 어젠다가 제일 많이 등장한 곳이기도 해서.
장혜영
카프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싶으신 정치적 의제가 있다면요?
젠
대표적으로는 차별금지법 제정은 꼭 다뤄야 할 의제고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기본권 보장 등에 대해서도 다뤄보고 싶어요. 나아가 보편적으로 이야기 할 수있는 환경과 기후 관련 주제나, 개인적으로는 영케어러 이슈에도 관심이 있어서 당사자성이 있는 분들과 생각을 나눠볼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하고 싶어요.
도토리
저 또한 혼인평등법과 차별금지법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어요. 여성인권 관련 이슈들도 많이 찾아보게 되죠.여성가족부를 공공연하게 폐지하겠다느니, 줄곧 혐오 정치를 하는 것에 신물이 나요. 성차별에 대한 제도적인 보호 또한 차별금지법 제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겠죠. 그리고 미국,유럽 중심으로 퍼지는 세계적인 극우화 추세도 걱정거리고요, 한국도 기로에 서있는 느낌이라 현 시점이 정말 중요하단 생각이 들어요. 그 외에도 이 공간 안에서는 다양한 주제를 나눠보고 싶어요. 퀴어 여성이라고 ‘퀴어 여성 이슈’에만 관심 있는 건 아니잖아요. 관심사가 다양하니까요. 저희도 새로 접할 게 많을 것 같아요.
그 외에 개인적으로는, 공간을 마련하면서 안타깝게도 장애인 접근성을 보장하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마음에 걸려요.